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에는 백제시대 때 쌓은 산성이 있다. 백제의 사비성 천도 이전인 서기 501년에 축성된 것으로 백제 당시에는 가림성(加林城)이라고 불리웠다는데 백제 멸망 후 성흥산성(聖興山城)이라고 불리다가 최근에 옛 이름대로 가림성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석성의 둘레는 1,350미터이고 높이는 4미터 가량 되는데, 성 내부에는 우물터, 건물터 등이 남아 있으며, 남문,동문, 서문 등 3개의 문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현재까지 남은 백제 성곽 가운데 쌓은 시기가 가장 확실한 산성이므로 백제시대의 성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산성이라고 한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백제부흥 운동의 거점이 되었엇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므로 18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산성의 한켠에 수령 450여년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다.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과 산 아래 마을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서 있는 이 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때는 서기 660년 여름. 가림성 성주의 아리따운 두 누이가 성주인 오빠를 찾아 산을 올라왔다. 당나라 군사들이 파죽지세로 물길을 따라 올라와 지금의 반조원 나루터 부근에 모여 있다는 소식과 함께 성을 지키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고 간청했다.
한 명의 군졸이라도 아쉬울 때지만, 아무리 그래도 누이들에게 직접 전쟁을 치르게 할 수 없었던 성주는 누이들에게 하산하라며 호통을 치기도 하고 달래도 보았지만 그들의 의지를 꺾을 도리가 없었고 성주의 아리따운 두 누이가 성을 지키는 일에 나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군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기가 높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안개가 자욱하여 한 치 앞도 볼수가 없었고 이튿날 안개가 겨우 흩어지기 시작하여, 성 마루에 올라선 성주와 두 누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숨이 막힐 듯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비성이 무참히 잿더미로 변한 것이 아닌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난공불락의 요지에 있는 데다 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해 있는 가림성을 공격했다가는 희생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알고, 때마침 안개가 자욱한 틈을 타 강 건너의 석성 쪽으로 방향을 돌려 거기서 사비성으로 진격해간 것이었다.
짙은 안개에 왕성을 지킬 기회를 놓쳐버린 성주와 누이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이제 살아서 무엇 하겠어요"
"왕도를 적의 손아귀에 들게 하다니 사람의 도리가 아니어요"
"죽음으로 사죄할 수밖에...."
성주와 두 누이는 비장한 눈물을 흘리며 자결하였다. 많은 군사들이 그 뒤를 따랐고 허탈해진 다른 군사들도 신발의 흙을 털어 모아 놓고 이 치욕을 잊지 말자며 사비성이 바라 보이는 곳에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산마루에 있는 이 느티나무라고 한다.
▲ 가림성 성벽. 드라마 <서동요><대왕 세종><뿌리 깊은 나무><계백> 등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높이 20여 미터, 몸통둘레 5미터에 이르는 느티나무. 이 나무는 '사랑나무'라고도 불리는데 가지 하나가 구부러져 뻗어 나가면서 몸통과 하트모양을 연출해서 그렇게 불렸다는데 안타깝게도 몇해 전 태풍에 가지가 잘려나가면서 지금은 그러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 유금필 장군 사당
산성 안에 고려의 개국공신인 유금필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유금필은 태조 왕건의 부하장수로 견훤을 물리쳐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고려의 개국 공신이다. 후백제를 멸한 뒤 왕건을 만나러 가는 도중 임천에 머물게 되었는데, 패잔병들의 노략질이 심하고 나쁜 병과 흉년이 겹쳐 백성들이 크게 고생하는 것을 보고 군량을 나누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하여 백성들은 살아 있는 장군의 사당을 세우고 그의 공덕을 칭송했다고 한다. 현재의 사당은 1976년에 옛 사당 옆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성흥산 아래 임천면사무소 왼편에 수령 350여년의 소나무가 있다. 높이는 4미터 정도이지만 옆으로 구부러져나간 가지가 자못 멋스럽다.
성흥산 아래에는 대조사(大鳥寺)가 자리하고 있다. 큰 절집은 아니지만 단출하고 호젓하다. 경내 뒤편에 높이 1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석불이 자리 잡고 있다. 전설에서는 백제 때 세워졌다고 하나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불로 보인다고 한다. 이웃한 논산 관촉사의 석불과 생김새도 같고 조성시기도 비슷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하는 이 석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한 노승이 큰 바위아래 앉아 염불을 외고 있었다. 노승은 염불하는 즐거움으로 살고 있었다. 그에게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죽기 전에 불상 하나를 세우는 것이었다. 염불을 하고 난 노승이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조차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소원입니다. 절을 세워 불심에 살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옵고, 큰 불상을 세워 온 천하의 사람들이 찾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였다. 갑자기 사방이 환하게 밝아져왔고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황금빛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노승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새는 노승의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큰 바위에 내려앉았다. 새가 큰 바위에 내려앉자 빛이 더 찬란해지며 온 천지에 퍼졌다.
노승은 찬란한 금빛에 눈을 뜰 수가 없어 손으로 빛을 가리다가 깨어났다. 참으로 이상한 꿈이라 생각하며 일어나 큰 바위를 바라보았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큰 바위가 노승이 그처럼 간절하게 소망하였던 불상으로 바뀌어 있는게 아닌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틀림없는 불상이었다. 노승은 바로 그 자리에 꿇어앉아 절을 했다. 그러자 꿈에서 본 것 같은 밝은 빛이 불상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 빛은 멀리멀리 퍼져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빛을 따라 모여들기 시작했다.
"빛이 행운을 가져다준다!"
빛이 나는 불상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불상에 대한 소문이 왕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왕은 이 불상이 있는곳을 성소로 여기고 큰 절을 짓게 하였다. 절의 규모가 워낙 커서 공사기간이 길어졌는데 어디선가 큰 새들이 날아와 울어주었고 맑은 새소리에 이룬들은 피곤함을 잊고 부지런히 일하여 5년만에 절을 완공할 수 있었다. '황금빛 큰 새가 축복을 가져다주었다'는 뜻을 기리기 위해 절 이름을 '대조사(大鳥寺)'라고 지었다고 한다.
불상 위로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마치 보관처럼 머리 위로 드리워져있어 경이롭고 신비한 느낌인데 이 소나무는 높이 15미터에 수령이 350년이 넘었다고 한다.
송충이가 다른 소나무는 다 갉아 먹어도 미륵불을 감싸고 있는 이 소나무에는 끼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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