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데리고 나서는 여행길은 더욱 설레고 흥분이 된다.
이번 여행은 청도(靑道)를 경유하여 태산(泰山)을 오르고 공자와 맹자의 고향인 곡부(曲部)와 추성(鄒城)을 다녀오는 4박5일의 여정이다.
중학생인 아들의 눈높이에 맞춰 일정을 잡았지만 은근히 기대가 되는 건 내 쪽이었다.
중국인들이 오악(五岳)이라 하여 신성시하는 다섯 개의 산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긴다는 태산을 오르고 세계4대성인으로 일컬어지는 공자께서 태어나고 잠들어있는 공묘(孔廟)를 참배하고 맹자의 고향인 맹묘(孟廟)까지 다녀오는 일정이니 아니 설렐 수 있으랴.
"바라건대 아들아! 그곳에서 그들의 고매한 식견과 끝없는 향학열,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몸으로 한껏 체득해보아라 이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다. "
중국 동방항공 비행기는 앞 사람 좌석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작았다. 기내식을 먹고 나니 곧 청도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금방이다
청도는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깝기 때문인지 한글 간판도 많이 보이고 과거 독일의 지배를 받은 때문인지 지붕이 빨간 서양식 단독주택들이 이국적이며 바닷가 쪽으로는 고층빌딩이 즐비한 깨끗한 도시였다.
민박집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걸어서 청도해변으로 갔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바닷가를 거닐었다. 낮엔 제법 사람이 많았는데 밤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보인다. 중국은 오랫동안 공산당 지배 영향 때문에 유흥문화가 발전하지 않았고 밤이 되면 일찍 집에 들어가 잔다고 한다. 우리도 시내로 걸어와 인터넷으로 예약해둔 민박집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태산으로 가기위해 기차역으로 갔다. 역전에는 노동절 연휴 때문인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시간이 맞지 않아 어제 예매해둔 열차표를 반환하고 다시 사려하니 오후에 떠나는 차밖에 없단다. 할 수 없이 기차역에서 나와 버스터미널로 가서 차 시간을 물어보니 버스 또한 오후 차밖에 없다고 한다. 난감한 표정을 짓자 차표 파는 아가씨가 제남(濟南)까지 가서 그곳에서 태안(泰安)가는 차를 갈아타라고 한다. 제남에 가면 태안 가는 차가 많이 있다고.
지도상에선 청도에서 제남까지 가까운 거리처럼 보였는데 차는 6시간 넘게 달렸다. 중국 땅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 실감이 난다. 차창 밖으로는 그리 풍요롭지도 황량하지도 않은 벌판이 끝없이 이어지고 지루함 끝에 제남에 도착한다. 다시 차를 갈아타고 한시간정도 후에 태산 산자락이 가까이 보이는 태안에 도착했다. 하지만 시간은 벌써 오후 5시다.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가서 그곳부터 먼저 구경해야겠다. 곡부에 한국 사람이 식당과 민박집을 운영하는 곳이 있다하여 전화를 했으나 자리에 없고 종업원인 듯한 여자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다. 중국에 와서 내 중국어 실력이 처음 한계를 보이는 순간이다. 잠시 난처해하고 있노라니 아까부터 우리 뒤를 따라다니던 호객행위를 하는 여자가 다가오더니 시내는 방값이 비싸고 태산입구에 가면 싸고 좋은 방이 많다고 하여 그 여자의 차를 타고 내린 곳은 천외촌(天外村)이었다. 우리의 설악동 같은 곳 이라고나 할까. 방값은 조금 비싼듯하나 깨끗하고 괜찮았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어젯밤에도 거의 한숨도 못 잤는데...
12시 가량 되었을까 옆방에서 사람들이 깨어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 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려 출발하는가보다 그래 우리도 일출을 보러가자
형준이를 깨웠다. 곤히 자는 걸 깨워 미안했지만 형준이는 벌떡 일어난다.
여관 밖으로 나오니 미니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입장료와 중천문(中天門)까지 가는 차표 값을 지불하고 차에 올랐다. 입구에서 차를 갈아타고 중천문에서 내린 다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남천문까지 7666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한단다. 이 돌계단들은 옛날 진시황이 태산에 오르기 쉽게 하기 위하여 쌓은 것 이라한다. 한밤중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있었다. 거의가 젋은 사람들이다. 어둠속에서 한국말도 들려와 다가가서 물었더니 직장일로 위해(威海)에 파견 나와 있다는 부자(父子)였다. 자욱한 밤안개 사이로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와 나무들이 신비감을 더해준다. 가파른 돌계단은 한밤중인데도 이마에 땀을 흐르게 하지만 수많은 황제와 명현들의 일화가 서려있는 장소가 줄지어 나타나고 바위에는 시인묵객들의 태산을 찬미하는 글귀들이 암각 되어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형준이는 태산에 오길 정말 잘했다며 아주 좋아한다. 어릴 때 조금만 걸어도 업어달라던 녀석이 나보다 앞서서 잘도 올라간다. 가장 가파른 구간인 18방을 지난다. 높이400m, 1600개의 계단이 거의 수직으로 서있는 구간이다. 발을 헛디디면 한참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다.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는 승선방을 지나 어느덧 남천문(南天門)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앉거나 누워서 쉬고 있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지척이라 일출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다. 남천문까지는 인간의 영역이고 이곳은 신의 영역이란다.
그래서 이름도 천가(天街)다. 아! 드디어 내가 태산 속에 있는가. 삼황오제의 순임금을 비롯하여 역대71명의 황제가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태산을 찾았다한다. 공자, 이백, 두보를 비롯한 수많은 명현이 올랐고 예찬한 그곳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컵라면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옆을 보니 인민군외투를 빌려주는 곳이 있었다. 정상이 추운가보다. 10위안씩 두벌을 빌리고 보증금까지 100위안을 지불했다. 잠시 바닥에 누워 있다가 사람들이 움직이길래 우리도 따라나선다. 정상부근엔 절도 있고 도교사원, 기념품가게, 호텔까지 있다. 1545m의 태산정상에는 옥황정 이라고 하는 도교사원이 있었다. 마당에는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무자비(無字碑)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2100년 전 한 무제가 정상에 올라 자신의 업적을 글로 남기려 했지만 태산의 위용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한다.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고 공자는 말했었다. 26억년 형성된 태산은 6억년전에 바다로 가라앉았다가 1억년전에 다시 솟아올랐기 때문에 해저지층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중국인들은 태산에 올라 보는 것이 평생소원 이라고 한다. 정상의 널찍한 바위위에 앉아 일출을 기다렸지만 해는 나오지 않고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쉽지만 하산을 해야겠다. 날이 밝아서 태산의 전경들이 훤히 보인다. 우리가 밤새 땀 흘리며 걸어 오른 길을 케이블카타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역시 밤에 오르길 잘 한 것 같다.
언제 다시 이 산에 올 수 있을까. 재작년인가 이군익 이라는 한국의 효자가 자기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태산에 올라 이곳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나중에 손자가 태어나면 이곳에 다시 와야겠다. 그 녀석에게 옛날 네 아버지와 내가 손잡고 이산에 올랐노라고 말해줘야지...
묵었던 여관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로비에서 어제 호객행위를 하던 여자가 손을 흔든다. 350위안에 공묘를 구경하고 맹자의 고향인 추성에도 가고 다시 태안으로 돌아오기로 예약을 했었다. 차를 타고 출발하려고 하다가 여자가 역전에 가서 자기 남편을 잠깐 만나고서 가자고하여 좋다고 했더니 역전에 도착하자 여자는 내리고 남편이란 자가 운전석에 앉는데 이 작자 얼굴이 엄청 험상궂다. 찌뿌둥한 표정으로 말없이 한참을 가더니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온다. 350위안에 공묘, 공부, 공림을 관람하고 맹묘까지 다녀오기로 어제 네 마누라와 약속했다 했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곳이 얼마나 넓은 줄 아느냐면서. 그래도 어제 네 마누라와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다 했더니 자기 마누라가 머리가 나빠서 그랬을 거란다. 이놈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드디어 중국에 와서 떼 놈과 싸울 일이 생기는구나 생각되어 약간 긴장이 된다.
그렇지만 살살 달래야겠다. 빨리빨리 움직일테니 공묘와 맹묘를 가 보자고했다. 그래도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안 된다고 한다. 그러고는 차를 공묘근처에 대더니 저쪽 편에 서있던 여자를 불러 온다. 여자가 하는 말이 공묘, 공부, 공림은 너무 넓어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서 자기를 따라오란다. 웬 친절한 아줌마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이 여자는 공묘의 유료 가이드였다.
하지만 이 가이드 아줌마의 안내와 설명으로 구경은 잘 할 수 있었다. 공묘는 북경의 자금성, 태안의 대묘와 함께 중국의 3대 고건축물이라는 대성전을 비롯한 추모관이 있는 지역이고 공림은 공자를 비롯해 공 씨 일가 십만여기의 무덤이 있는 지역이며 공부는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사저 등을 칭하는데 이것들은 내 상상이상으로 그 규모가 크고 넓어 공자라는 큰 인물을 추모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내 눈길을 끈 것은 수령 1천~2천년이 넘는 수많은 나무들이었다. 일본의 메이지신궁에도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있어 고풍스런 분위기를 더해주었는데 공묘의 거목들 또한 그러했다.
공자도 영욕의 세월이 있었다. 성인으로 추앙받기도 하고 봉건의 원흉으로 박해도 받았다. 공자사후(死後), 묘 앞에 오두막을 짓고 스승의 곁을 지켰던 자공을 비롯한 제자들과 수많은 제자의 제자들-
그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고 이 나무들만이 남아 공자 곁을 지키며 말없이 서있으니 이 나무들을 어찌 무심히만 바라볼 수 있으리요.
듣던 대로 공자의 묘는 봉분도 크지 않고 잡초가 무성했다. 하지만 이는 대성인의 무덤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는 중국인들의 생각 때문이라 한다.
묘 앞에서 형준이와 함께 잠시 머리 숙여 추모의 시간을 갖는다.
나이가 들면서 공자의 말씀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예수, 석가와 달리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지 않았고 경천애인(敬天愛人)했던 공자. 공자 이전에 학문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공자는 학문을 함에 귀천을 두지 않았고 제자를 가려 받지 않았다.
묘 주위에 관람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머리 숙여 참배하는 것은 우리뿐이다. 현대 중국인에게 공자의 의미는 얼마큼일까
가이드와 작별하고 차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맹묘에 가자고 해봤지만 안 된단다. 그냥 태안으로 돌아왔지만 못내 아쉽다. 어쩌면 공묘보다 더 가보고 싶은 맹묘였는데...
왔던 길의 역순으로 태안에서 제남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청도로 돌아간다.
형준이는 머리를 내게 기대고 자고 있다.
맹모단기(孟母斷機)라는 고사가 떠오른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사실 맹자가 성인에 이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이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였다고 한다. 맹자가 큰 뜻을 품고 공부를 하기위해 멀리 떠나 있었는데 몇 년이 안 되어 집도 그립고 공부도 지쳐 집으로 돌아 왔다한다. 마침 어머니가 베틀위에서 베를 짜다가 돌아온 맹자를 보고 “그래 벌써 학문을 다 이루었느냐”물었다
“그냥 쓸 만큼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공부도 그만하고 싶어요”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는 베틀위에서 내려와 짜고 있던 베를 칼로 확 잘라 버렸다한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행동에 맹자가 아연 실색하자 어머니는 단호한 목소리로“네가 학문을 다 이루지 못한 것은 이렇게 짜다말고 찢어진 베와 같으니 무슨 소용이 있느냐”하며 대성통곡을 하니 맹자가 크게 뉘우치고 다시 돌아가 용맹정진하여 마침내 성인의 학문을 이루었다한다.
잠든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내 자식에게 나는 얼마만큼의 아버지일까. 이번 여행이 아들에게 얼마만큼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까. 나와 함께한 이번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해줄까.
어두운 차창 밖으로 밤비가 내리고 나는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청도 5.4광장
형준이 중국친구 '리홍지'
제남 시외버스 터미널
타이안으로 가는 차창밖 풍경
태산이 위치한 타이안 시내
천외촌 모텔 비교적 깨끗하네요
대성전안에있는 공자의 흉상
곡부거리
공자의 묘가있는 '공림'입니다
공자의 무덤입니다
가이드 아줌씨
청도해변
형준이 중국여자친구 '최아혜'
청도시내 오리요리 전문점
여행을 마치고 서울시청광장의 형준이. 한층 성숙해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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