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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 후쿠오카 여행

노공이산 2015. 4. 19. 11:40

후쿠오카에 도착한 첫 날, 다자이후(太宰府)에 갔다. JR하카타역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JR후쓰카이치(二日市)역에 내리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10여분 정도 시내를 걸어 니시테쓰(西鐵)후쓰카이치역으로 간 다음 전철을 타고 니시테쓰 다자이후역에 도착했다. 다자이후는 큐슈지역을 다스리는 총독부가 있던 곳인만큼 후쿠오카의 역사유적은 거의 다 이곳에 모여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큐슈국립박물관도 이곳에 있고 다자이후 청사(廳舍)유적지를 비롯해 백제인이 축조했다는 수성(水城)터와 대야성(大野城), 간제온지(觀世音寺), 가이단인(戒壇院), 고묘젠지(光明禪寺) 등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지만 해가 저물어 오늘은 다자이후를 대표하는 다자이후 덴만구(太宰府 天滿宮)만을 가기로 결정했다.

 

 

 

 

 ▲ 니시테츠(西鐵) 다자이후역(太宰府驛)

 

다자이후 덴만구는 일본인에게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를 기리고자 세운 신사로 일본에는 이 사람을 기리는 신사가 1500여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이 곳 다자이후 덴만구가 총본산 격이라고 한다. 이곳은 항상 참배객들로 붐비지만 입시철이면 합격 기원 부적을 사려고 일본 전역에서 20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 들기도 한다고 한다.

 

 

 

다자이후역에 내리자 오른쪽으로 신사로 향하는 참도(參道)가 보이고 참도 양 옆으로는 일본의 전통공예나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있다.

이 중 많은 가게에서 이 곳 다자이후의 명물인 우메가에모찌(梅枝餠)를 팔고 있었다. 이 구운 찹쌀떡이 다자이후의 명물이 된데도 미치자네와 연관이 있다. 그가 유배지에서 쓸쓸히 지내고 있을 때 이웃에 살던 조묘(淨妙)라는 할머니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맛있게 빚은 찹쌀떡을 따뜻하게 구워서 미치자네에게 바쳤고 미치자네는 이 구운 찹쌀떡을 즐겨 먹어, 그가 죽었을 때 영구(靈柩)에는 그가 좋아했던 매화나무  한 가지를 얹고 그 위에 구운 찹쌀떡을 얹어서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 전통복장을 한 여성들이 있어서 같이 사진도 찍고

 

 

 

 

비오는 거리에 서서 잠시 스가와라 미치자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스가하라가는 대대로 이름 난 학자 집안이었다고 한다. 특히 미치자네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인품이 훌륭하고 시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고 한다. 천황의 신임을 얻어 벼슬이 조선의 우의정 격인 우대신(右大臣)까지 올랐으며 당나라에 사절단을 보내 문물을 배워오던 견당사(遣唐使) 제도를 비용만 많이 들 뿐 실속이 없다며 폐지시켰고 그 결과 경제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일방적으로 유입되던 중국문화를 차단하게 되어 일본문화를 성숙시켰다는 평가를 후세에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성취는 정적의 불안과 모함을 받게 되었으니 오랜동안 정치의 중추에 있던 후지와라가(藤原家)는 미치자네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워 큐슈지방으로 좌천시켜 보내고 말았다.

다자이후로 온 뒤 아들이 죽고 미치자네도 병으로 고생하다 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그 후에 벌어지게 되었으니 천황을 비롯한 중신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조정 대신 두 명이 죽게되고 사람들은 모두 미치자네의 원한때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교토에는 매년 홍수와 태풍 등의 천재지변이 잇달았고 유행병과 폐병까지 돌았다. 미치자네에게 누명을 씌웠던 도키히라는 대궐 안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었고 그와 혈연관계에 있던 왕실 사람들도 잇달아 죽어나갔다. 조정은 두려움을 느끼고 부랴부랴 미치자네가 좌천되기 전의 직책인 우대신으로 되돌렸으나 미치자네의 좌천을 결정한 다이고 천황까지 죽게 되었다.

후지와라가는 미치자네의 유해가 묻힌 무덤 위에 신전을 지어주어 그의 원혼을 달래기에 이르게 되니 이 곳이 바로 다자이후 덴만구이다.

 

 

 

 

 

 

 

 

 

 

 

 

참도 양옆으로 여러 곳의 우메가에모찌라는 구운 모찌가게가  있고 가게에 따라 맛도 조금 씩 다른데 가장 유명한 가게는 중간쯤에 위치한 이 집이다. 카사 노 야(傘家). 여러 명의 종업원들이 쉴새없이 손을 놀리며 모찌를 구워내고 있었다. 비가 와서 날씨가 조금 서늘한데 따뜻하고 달달한 모찌를 먹으니 더욱 맛이 좋았다. 오랫동안 생각날 것 같다.

 

 

 

 

 

 

 

덴만구 경내에 들어서자 커다란 연못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신지이케(心字池) 한자 마음 心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는 이 연못은 거대한 매화나무들로 둘러싸여 절경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이보다 더 큰 매화나무는 본 적이 없었던것 같다. 이른 봄에 매화꽃이 피면 가히 절경일 것 같다.연못을 가로질러 건너가는 길에 다리가 세개 이어져있는데 이 다리들은 제일 앞에서부터 다이코바시, 히라바시, 다이코바시라고 하여 각각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는 이 다리를 건넘으로써 속세의 죄를 씻어내고 심신을 맑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있다고 한다.

 

 

 

 

 

 

 

 

 

 

 

 

 

 

 

 

 

 

 

 

 

 

 

 

 

 

 

 

 

 

 

본전(本殿).

905년에 처음 지은 후 소실되었다가 1591년에 새롭게 지었는데 화려하고 웅장한 모모야마 시대의 건축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원형 그대로 잘 보존이 되었지만 지붕은 1990년에 새로 교체했다고 한다.

 

 

 

 

 

 

 

비매(飛梅). 

본전 오른쪽에 있는 이 매화나무는 봄이 오면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는데 매화를 사랑했던 미치자네가 좌천길에 오르면서 쓸쓸한 심정에 매화를 바라보며 "동풍이 불면 향기를 실어 전해주려무나! 매화의 주인에게..." 라는 시로 읇었는데 이에 감동한 이 매화나무가 교토에서 이곳으로 날아와 미치자네가 이곳에 도착하자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보물전.

미치자네가 쓴 서적 등 보물 급 자료 5만여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입장시간이 09:00~16:30 까지라서 들어가보지 못했다.

 

 

 

 

 

고신규(御神牛).

누문 옆에 있는 이 황소 동상은 악한 기운을 쫓아내 주고 몸이 아픈 사람이 동상의 똑같은 부위를 쓰다듬으면 병이 낫는 영험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소의 머리를 만지고 나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머리가 총명해진다고 하여 입시철에는 이 동상의 머리를 만지려는 수험생들이 길게 줄을 선다고 한다.

 

이 소와 관련해서도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미치자네의 시신을 태우고 가던 소가 갑자기 길에 주저앉아 아무리 해도 움직이질않자 사람들은 망자의 뜻으로 보고 그 자리에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더구나 미치자네는 소띠해에 태어나 우(牛)월 우(牛)시에 죽었다고 하니 소와 보통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다자이후 덴만구 바로 옆에는 국립 큐슈박물관이 있는데 이 곳 또한 입장시간이 지났기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일본의 박물관이나 전시장은 거의 다 오후 5시면 문을 닫아버려서 늘 아쉽기만 하다.

 

 

 

 

 

천천히 경내를 다시 둘러본다. 거대한 매화나무들에 오랜동안 눈길이 간다. 참 장하게도 생겼다. 봄에 매화꽃이 만개할 때 꼭 다시 한번 오고싶다. 퇴계 선생도 그렇고 미치자네도 그렇고 덕망있는 학자들은 왜 그렇게 매화를 사랑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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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한번 고신규의 머리를 쓰다듬는 소띠해에 태어난 우리 아내.

 

 

 

 

 

 

'가사 노 야' 가게에 다시 들러 모찌도 두 봉지 샀다. 너무 달지도 않고 은은한 맛!!

 

 

 

참도 들머리에 있는 이 가게는 여러가지 콩에 옷을 입혀 튀긴 것등을 팔고 있었는데 시식도 할 수 있게 했다. 아내는 모두 맛있다며 이것 저것 사기 바쁘다.

 

 

하카타역으로 돌아오기위해 다자이후역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