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조지훈 문학길

노공이산 2014. 5. 30. 23:27

 

 

 

 

주실마을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위치한 주실마을은 1630년 호은공 조전 선생이 가솔들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며 한양조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된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조전 선생을 시조로 하여 스스로를 주실조씨라 부르고 있다. 한양조씨가 한양을 떠나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게 된 경위는 조광조의 기묘사화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조광조가 축출된 후 한양을 떠나 이곳 저곳으로 피해 다니던 호은 조전선생이 마을 뒤쪽의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매가 앉은 자리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매가 앉았던 자리가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72호로 지정된 '호은종택'이다.

산아래 고즈넉히 자리 잡은 고택들이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주실마을의 입구에는 외부에서 보면 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일명 '주실쑤'라는 숲이 있는데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시인의 숲'이라 불리우고 있다. 수령 100년의 소나무와 250여년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또 느릅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이 '시인의 숲'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이곳 주실 마을이 바로 시인 조지훈 선생의 생가가 있는 조지훈 선생의 고향마을이기 때문이다. '호은종택'이 바로 조지훈 선생의 생가이다. 옛부터 이곳 주실마을은 붓을 닮은 문필봉이 있어 문필가나 학자가 많이 나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호은종택'도 정면으로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는곳에 터를 잡고 있는 고택이다. 이곳 작은 시골마을인 주실마을에서는 지금까지 14명의 박사가 배출 되었다고 한다.

숲이 시작되는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숲으로 걸어 들어가면 길을 따라 좌우로 쉴 수 있도록 벤치가 마련되어 있고, 시를 적어 놓은 비석도 놓여 있다. 천천히 시를 읽어 보며, 산림욕을 즐겨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숲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내를 건너는 다리가 앞을 가로막는데, 의외로 다리 크기가 커서 놀라게 된다.

주실마을에는 현재 약 50여가구가 남아 주로 고추 농사 등을 지으며 생활 하고 있으며, 조지훈 선생의 생가인 '호은종택'외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인 '옥천종택'이 있고, 마을내에 '조지훈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조지훈 선생이 수학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72호인 월록서당, 만곡 조술도 선생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문하생들이 뜻을 모아 지은 만곡정사 등의 문화 유적이 있다. '호은종택'과 '조지훈문학관' 사이의 길을 따라 걸으면 시공원에 이르게 되는데 조지훈 선생의 시 가운데 약 20여편이 돌에 새겨져 방문객 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다.

주실마을에는 '옥천종택'에만 우물이 하나 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우물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주실이라는 마을이 배 형상으로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생겨 가라 앉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이곳 '옥천종택'의 우물을 길어다 먹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주실마을의 우물은 이것 하나 뿐이라고 한다. 대신 50여리 떨어진 곳에 수도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 하고 있다고 한다. '옥천종택'은 '호은종택'의 왼편 위쪽에 자리한 경상북도 지방의 전형적인 한옥 가옥이다. '옥천종택' 뒤로는 '창주정사'라는 문중의 서원 역할을 했던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호은종택'의 오른쪽으로는 '월록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호은종택(壺隱宗宅)

한국 근대 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 조지훈과 그의 형 조세림이 태어난 곳이다. 주실마을 한복판에 있으며

조선 중기 인조조에 입향조인 조전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창건했다.

 

이 집은 경상도 북부 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 집으로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나누어진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쪽에는 태실(胎室)이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고 솟을대문이 있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소실되었다가 1963년 복구되었다.

 

호은종택의 가훈은 삼불차(三不借)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말라는 조선조부터 이어져 온 가르침이다. 조선 후기 노론이 득세하던 시대, 야당이었던 남인으로서 이곳 선조들은 굶어 죽더라도 아쉬운 소리를 안 하는삶을 선택한다.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삶을 인간다운 자세로 보았던 그 정신은 의병활동했던 분들이나 창씨개명을 종용받자 자결을 택한 지훈 선생의 조부, 지조론을 펼쳤던 지훈선생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삼불차의 정신은 주실 마을에 세거를 정한 한양 조씨들의 자존심의 발로이자 근대사의 굴곡을 헤치고 빛을 찾아가는 삶의 지표가 되었을 것이다.

 

 

 ▲ 호은종택

 

 

                                                ▲ 호은종택 앞으로 문필봉과 연적봉이 보인다.

 

삼불차(三不借)정신

370여년 동안 주실마을 한양조씨 집안에 이어져오는 정신으로 "삼불차'란 글자그대로 빌려서는 아니되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돈이다. 남에게 돈을 빌리려면 구차한 자신의 형편과 사정을 늘어놓아 상대방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때론 거짓말도

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좋았던 관계마저 상실하여 사람마저 잃게 된다는 것.

둘째는 사람, 이것은 양자(養子)를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양자를 들이거나 또는 아들이 없다는

구실을 핑계삼아 첩을 들이거나 씨받이를 찾는 일이 성행하던 시절에도 한양조씨들은 16대 동안 친자로만 이어져왔다고 한다.

세 번째는 글이다. 글을 쓰되 남의 글을 훔치거나 떳떳하지 못하게 빌려쓰지 말고 자력으로 하라는 말이다. 평소에 좋은 글을 늘 대하고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문필봉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란 말이 있듯, 풍수지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주실마을에 걸출한 인재가 많이 배출된 사실을 이 마을의 지세를 들어 설명한다. 호은종택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정삼각형의 산, 문필봉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주실마을 산세의 모든 정기는 이 문필봉 하나에 집중되어 있는데, 주실에서 학자가 많이 배출된 것도, 조그만 마을에서 박사가 14명이나 나온 것도, 이 문필봉의 정기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양 조씨는 원래 영양에 입향한 후 원당리(지금의 영양읍 하원동)에 살다가 호은공 조전(壺隱公 趙佺)선생이 주실마을로 옮긴 뒤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과 학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지훈문학관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 선생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문학관이다. 지훈의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현판을 쓴 문학관은 170여 평 규모에 단층으로 지어진 목조 기와집이 'ㅁ'자 모양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조지훈의 대표적인 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동선을 따라 조지훈 선생의 삶과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문학관에는 지훈의 시에 김난희 여사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 작품들이 다수 있어서 더욱 애틋하다

 

 

매화송

 

매화꽃 다진 밤에

호젓이 달이 밝다

 

구부러진 가지 하나

영창에 비취나니

 

아리따운 사람을

멀리 보내

 

빈 방에 내 홀로

눈을 감아라

 

비단옷 감기듯이

사늘한 바람결에

 

떠도는 맑은 향기

암암한 옛 양자라

 

아리따운 사람이

다시 오는 듯

 

보내고 그리는 정도

싫지 않다 하더라

 

 

 

 

 

 

조지훈의 삶과 작품세계

1920년 경북 영양 주실마을에서 출생한 지훈은 본관이 한양(漢陽)이고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1939년 문장(文章)지에 <고풍의상>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온 그는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의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문학사에 연속성을 부여해준 큰 시인이다.

<청록집><풀잎단장><조지훈시선><역사 앞에서><여운> 등 그가 남긴 시집들은 모두 민족어의 보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매우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지훈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를 스스로 자신의 전공이라고 여기었다. 조부 조인석과 부친 조헌영으로부터 한학과 절의를 배워 체득하였고 혜화전문과 월정사에서 익힌 불경과 참선 또한 평생토록 연찬하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며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서 형성된 조지훈의 학문적 바탕은 현대교육만 받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 광복이 되자 10월에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이 되고 11월에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이 되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였고, 그 이후 1968년 기관지 확장으로 작고하기까지 조지훈이 저술한 <멋의 연구><한국문화사서설><한국민족운동사><시의 원리> 등의 저서는 한국학 연구의 영원한 명저가 되었다.

 

 

 

 

 

조지훈은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를 준엄하게 판별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지조론>에 나타나는 추상 같은 질책은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양심의 절규였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 < 지조론 > 가운데서 -

 

조지훈은 근면하면서 여유 있고 정직하면서 관대하고 근엄하면서 소탈한 현대의 선비였다. 매천이 절명의 순간에도 "창공을 비추는 촛불"로 자신의 죽음을 관조하였듯이 조지훈은 나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는 신념을 지니고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조지훈에게 멋은 저항과 죽음의 자리에서도 지녀야 할 삶의 척도였다.

조지훈은 호탕한 멋과 준엄한 원칙 위에 재능, 교양, 인품이 조화를 이룬 대인이었다.

 

 

시인의 숲

주실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보호숲. 외부로부터 마을로 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곳에는

조지훈의 시 <빛을 찾아 가는 길>을 새긴 시비가 있고 2차선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스물한살에 요절한 그의 형 세림 조동진의

시비가 있다.

 

 

지훈시공원

호은종택에서 지훈문학관으로 가는 길에 지훈시공원이 있다. 지훈의 시 가운데 골라 뽑은 20여 편이 돌에 새겨져 있으며, 쉴 수 있는 쉼터와 자그마한 공연장이 있다. 한 작품씩 음미하며 나무계단을 따라가다보면 아늑한 산세가 편안한 기운을 북돋운다.

 

 

 

파초우(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낙화 >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생태탐방로

 

 

 

주실마을 뒤편 야트막한 산을 따라 조성되어 있으며 포근하고 고즈녁한 주실마을의 풍광과 마을의 지형과 지세를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비교적 가벼운 산책로여서 때묻지않은 자연속에서 참다운 힐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외씨버선길(조지훈문학길)

우리나라 대표 청정 지역인 청송, 영양, 봉화, 영월의 마을, 들길, 산길을 이은 240킬로미터의 길이 <외씨버선길>이며

13개의  구간은 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다. 여섯 째 구간인 <조지훈문학길>은 영양전통시장에서 영양향교를 거쳐 조지훈문학관에 이르는 13.7km의 구간이다. 영양 전통시장에서 인심을 느끼고 연꽃의 향기에 취하며, 소나무 숲길과 척금대에서 지조와 절개를 배우며

조지훈 시인의 삶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