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스님, 만공스님, 그리고 일엽스님...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거찰의 모습을 간직한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의 본사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 때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백제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智命法師)가 창건하고 원효가 중수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말에 경허(鏡虛)가 선풍(禪風)을 일으킨 뒤 1898년(고종 35) 그의 제자인 만공(滿空)의 중창으로 번성하여 현재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 수덕사 안내도
수덕사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신라시대 때 중창불사를 준비하던 중 한 여인이 불사를 돕겠다고 자청했다고 한다. 그때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젋은이가 그 여인에게 청혼을 하고 큰 재산을 불사에 보탰다. 불사를 마치고 청년이 여자와 함께 떠나자고 하자 여자는 '옷을 갈아입겠다'며 멈칫거렸다. 청년이 여자를 잡으니 여자는 버선 한짝만 남기고 옆에 있던 바위틈으로 사라졌다. 지금 대웅전 서쪽 백련당 뒤편의 바로 그 바위다. 여자는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것이다. 이후 여자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창건설화와 관련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져온다.덕산향토지(德山鄕土誌)에 실려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주마을(오늘날 홍성)에 '수덕'이란 도령이 살았다. 수덕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청혼을 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한다. 하지만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에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지었기때문에 마침내 완공할 수 있었고 덕숭낭자도 어쩔 수 없이 결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낭자는 도령이 자기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참지못한 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도령의 손에는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였고 바위옆에는 버선 모양의 꽃이 피어났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고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이후 절은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고 하였다 한다.
▲ 버선꽃
▲ 일주문을 지나면 승탑밭이 있고 방장을 역임했던 스님 세분의 승탑이 있다.
▲ 제1대 혜암스님
혜암스님은 1886년에 황해도에서 3대독자로 출생했으며1900년 15세때 보암스님을 은사로, 금운스님을 계사로 득도했다고 한다.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고, 1984년에는 100세의 고령으로 미국 서부에 있는 능인선원의 봉불식에 참석, 대한항공 역사상
가장 고령 탑승객으로 기록되기도 했다고 한다.
1984년말에 설립된 덕숭총림의 초대방장으로 초대 되었고 1985년 101세(법랍89세)로 열반에 들었다.
▲ 제2대 벽초스님
벽초 경선(碧超 鏡禪, 1899~1986) 스님은 수덕사를 중창하여 오늘날의 대사찰로 만들었다.
1배 이상의 절을 사양하면서, 말로써 가르치지 않고 행行으로써 제자들을 가르쳐 보현보살의 화신이라 칭송받았다.
속성은 마씨馬氏이고, 호는 벽초碧超 , 법명은 경선鏡禪이다. 아버지는 정식正植이고 충청남도 청양에서 출생하였다.
1908년 13세 때 탁발 나온 만공스님에게 감화를 받아 아버지와 함께 수덕사로 출가, 만공선사께 삭발 수계 후 만공스님을 따라 금강산 유점사와 오대산 지리산 등의 명산을 다니면서 수도하였다. 그 뒤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어 1940년부터 30여년 간 수덕사 주지를 지내며 수행자들의 공부를 돌보기 위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고,수덕사에서 정혜사까지 이르는 천팔십 돌계단을 쌓았다.
1985년에 덕숭총림 德崇叢林 2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선사께서는 잠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공부라 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알 것을 강조했던 스님은 평생 법상法床에 올라 법문을 하지 않았다고 하며 오늘날까지도 스님의 선농일여사상 禪 農一如思想은세간의 큰 귀감이 되고 있다.
1986년 5월2일 장례를 간단히 치르라는 당부를 남기고 수덕사에서 입적하였다.
▲ 제3대 원담스님
7세때에 출가하여 만공스님을 시봉하며 천진불로 불렸던 원담스님은 1926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났다.
세속의 이름은 몽술(夢述)인데, 어머니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1933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들었다. 1936년 만공스님에게 전법계를 받아 경허, 만공스님으로 이어지는 근대 불교의 뿌리를 계승하였으며 한문과 경전에 두루 밝았던 스님은 붓글씨에도 능하여 많은 곳에 스님의 글씨가 전해지고 있다.
▲ '덕숭산 수덕사' 소전 손재형의 글씨이다.
▲ '동방제일선원' 혜암스님의 글씨이다.
▲ 수덕사 '선 미술관' 원담스님의 글씨와 행장이 전시되고 있었다.
▲ 수덕여관. 고암 이응로 화백이 살았던 목조 한옥 건물이다.
▲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49호이며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집이다. 임진왜란 때 수덕사의 모든 전각들이 불타버렸으나 이 대웅전만은 무사하였다고 한다. 가구 수법이 부석사 무량수전과 비슷하며 세부 양식 역시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이 그 구조.장식.양식.규모.형태 등에서 발견된다. 외관은 각 부재가 크고 굵기 때문에 안정감이 있고 측면은 특히 아름답다. 약간 배흘림을 가진 기둥을 연결하는 경쾌한 인방, 고주와 평주를 잇는 퇴보, 고주간을 맞잡는 대들보 등의 직선재와 이들을 지탱하는 다분히 장식적인 포대공, 그리고 곡률이 큰 우미량들이 이루는 조화와 이들이 흰벽을 구획한 세련된 구도는 한국 고건축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건립 연대(1308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서 다른 건물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내가 수덕사에 처음 와 본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데, 그 때와 비교하면 모습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수덕사의 모습은 변하였어도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스님들, 경허.만공.보월.전강.용음.고봉.금봉.혜암.춘성.금오.벽초.금봉.춘성.원담.법장스님과 법희.만성.일엽 등 비구니 스님들 ...
이들의 이야기가 있어 수덕사는 각별할 수 밖에 없다. 벽초스님이 손수 길을 닦았다는 1080 돌 계단을 오르면서 그 스님들의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 향운각 너머로 내포의 명산 가야산이 보인다.
▲ 돌계단길에서 만나는 '사면석불'
▲ 관음보살입상
▲ '만공탑'이라고 불리는 만공 월면스님의 승탑
만공(滿空)(1871년~1946년 10월20일)스님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였으며 한국현대불교의 대선사였다.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불교를 지키려 애썼고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한국불교계에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본명이 송도암(宋道巖)인 만공은 충청남도 서산군 태안면 상일리(현, 태안군 태안읍 상일리)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만공은 법호이다. 따라서 월면스님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수월,혜월과 함께 삼월(三月)이라하여 경허의 3제자로 일컬어진다.1883년 13세때에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금산사에 올랐다가 불상을 보고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 그 길로 공주 동학사에 입산하여 진암(眞巖)의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다.
1884년 경허의 인도로 서산시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경허(鏡虛)를 계사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 소림초당
▲ 사천왕문
▲ 환희대. 일엽스님이 거처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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