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갈라
-유치환-
고열(苦熱)과 자신(自身)의 탐욕에
여지 없이 건조(乾燥) 풍화(風化)한 넉마의 거리
모두가 허기(虛飢)걸린 게사니 같이 붐벼 나는 속을
-칼 가시오!
-칼 가시오!
한 사나이 있어 칼을 갈라 외치며 간다.
그렇다.
너희 정녕 칼들을 갈라.
시퍼렇게 칼을 갈아 들고들 나서라.
그러나 여기
선(善)이 사기(詐欺)하는 거리에선
윤리(倫理)가 폭행(暴行)하는 거리에선
칼은 깍두기를 써는 것밖에는 몰라
칼은 발톱을 깍는 것밖에는 감쪽같이 몰라
환도(環刀)도 비수도
식(食)칼처럼 값 없이 버려져 녹슬거니
그 환도를 찾아 갈라
비수를 찾아 갈라
그리하여 너희를 마침내 이같이
기갈(飢渴)들여 미치게 한 자(者)를 찾아
가위눌려 뒤짚이게 한 자(者)를 찾아
손에손에 그 시퍼런 날들을 들고 게사니 같이 덤벼
남나의 어느 모가지든 닥치는대로 컥컥 찔러
황홀히 뿜어 나는 그 새빨간 선지피를
희광이같이 희희대고 들이켜라는데
그리하여 그 목 마른 기갈들을 추기라는데-
그러나 여기 도둑이 도둑 맞는 저자에선
대낮에도 더듬는 무리들의 저자에선
이 구원(救援)의 복음(福音)은 도무지 팔리지가 않아
-칼 가시오!
-칼 가시오!
사나이는 헛되이 외치고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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