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굴곡진 팝의 황제 영원한 전설로 남다

노공이산 2009. 6. 27. 14:09

 

굴곡진 팝의 황제 영원한 전설로 남다

 

▲ 세계적 팝스타 마이클 잭슨이

2002년 4월20일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을 녹화하면서

 자신의 노래 ‘데인저러스(dangerous)’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다.

 

 

 

 

'팝의황제' 마이클 잭슨

 

얼굴이 수없이 변했듯, 그의 삶도 따라 춤췄다.

1958년 아홉 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난 잭슨은 다섯살 어린 나이에 치열한 연예계의 정글로 들어섰고, 일찌감치 무대를 평정하며 팝의 역사를 새롭게 섰다. 그는 리듬앤블루스(R&B)와 팝뮤직, 흑인과 백인 음악의 골을 메웠다. 반짝이는 장갑과 군복 스타일 재킷, 조종사용 안경은 그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받은 화려한 스타의 조명은 인생의 그늘도 그만큼 짙게 만들었다. 그에겐 다른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잭슨과 형제들에게 매질까지 하며 연습을 강요했다. 어린 시절을 빼앗긴 갈증 때문인지 그는 어린아이들과 ‘피터 팬’ 같은 삶에 집착하게 됐다. 그가 성형수술에 집착한 것도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잦은 성형 후유증에 어린이 성추행 추문 4억달러 빚더미…재기공연 끝내 꿈으로

 

1993년 어린이 성추행 사건은 그의 인생에 황혼을 몰고 오기 시작했다. 그는 합의금으로 2000만달러를 지급했지만, 명예는 바닥에 떨어졌다. 이후에도 잇따른 어린이 성희롱 논란이 그를 괴롭혔다. “침대에서 같이 잤지만 성추행은 없었다”는 해명에도 팬들의 실망은 커졌다.

 

잭슨은 흑인 음악가로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두며 ‘인종의 벽’을 허물었지만, 역설적으로 더 백인의 하얀 피부를 닮아갔다. 무리한 성형 후유증으로 코는 갈수록 내려앉았고,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목소리는 갈수록 소녀처럼 가늘어졌다. 피부암까지 덮쳤다. 팬은 멀어졌고, 파파라치들만 그의 뒤를 쫓았다. 잭슨은 바레인, 두바이, 아일랜드를 수년간 떠돌았다. 갈수록 빚은 늘어났다.

 

두 번의 결혼도 오래가지 못했다. 1994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첫 결혼을 했지만 어린이 성추행 여파 속에 2년 만에 헤어졌다. 1996년 성형수술 때 만난 간호사와 결혼해 2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1999년 다시 헤어졌다. 2002년에는 독일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대리모가 낳은 갓난쟁이 막내아들을 발코니에서 잡고 흔들어 세계를 경악시켰다. <에이피>(AP) 통신은 잭슨이 4억달러의 빚더미에 시달렸다고 26일 전했다.

 

쉰살의 잭슨은 화려한 조명 아래 부활을 꿈꾸며 다음달 13일 런던에서 열릴 콘서트를 준비해 왔다. 팬들은 그의 1969년 노래 ‘아이 원트 유 백’처럼 그의 귀환을 기다렸다. 그러나 잭슨은 무대로 돌아가겠다는 ‘아일 비 데어’(1970)라는 대답 없이, 뒷걸음질쳐 아련히 우리 곁을 떠났다.

 

 

‘스릴러’ 1억4천만장 앨범 판매량 독보적 혁신적 비트·멜로디로 인종·세대 아울러

 

‘팝의 황제’는 이제 영원한 ‘팝의 전설’이 됐다. 50살이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마이클 잭슨이 남겨놓고 간 유산은 너무나 크고 넓다. 앞으로 팝의 역사에 또 다른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해도 ‘팝의 황제’란 칭호는 그에게만 헌정될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 인생은 숱한 기록의 역사이기도 하다. 처음 음악을 시작했던 잭슨 파이브 시절, 그는 5살 나이에 최연소 리드 보컬로 활약했다. 잭슨 파이브는 데뷔곡 ‘아이 원트 유 백’을 시작으로 ‘에이비시’, ‘더 러브 유 세이브’, ‘아윌 비 데어’까지 4곡을 연속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1위에 올리는 진기록을 세웠다. 마이클 잭슨은 세계적인 대중음악잡지 <롤링 스톤>지의 표지를 장식한 최초의 흑인 음악인이자 가장 어린 나이의 음악인이 된다.

 

 

 

성인이 되어 솔로 활동을 시작한 뒤에도 기록들은 계속 쌓여갔다. 첫 솔로 앨범 <오프 더 월>은 1979년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고, 1982년 낸 <스릴러> 앨범은 팝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면서 말 그대로 ‘역사’가 됐다. 37주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던 <스릴러>는 현재까지 약 1억400만 장이 팔려나간 걸로 알려져 있다.

 

마이클 잭슨은 이런 기록뿐 아니라 음악만으로도 황제의 자격이 있었다. 천재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함께 지금도 넘어설 수 없는 혁신적인 비트와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퀸시 존스와 결별한 뒤에는 테디 라일리라는 명프로듀서와 손잡고 시대의 흐름에 맞는 음악들을 만들어냈다. 알앤비, 소울, 록, 힙합, 펑크, 뉴 잭 스윙 등 광범위한 장르들이 그의 앨범에는 모두 담겨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음악이 위대했던 이유는 인종과 세대를 모두 아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이클 잭슨은 지미 헨드릭스 이후 흑인과 백인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음악인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앨범에는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 밴 헤일런, 토토, 슬래쉬(건스 앤 로지스) 등 다양한 장르와 인종의 음악인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 그의 음악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고 팝의 지형도를 바꿔놓았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스릴러> 발표 이후 그가 추었던 ‘문워크’와 브레이크 댄스는 현재 30~40대들에겐 하나의 추억이 됐다.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앨범은 팬들이 선곡한 베스트 앨범 <킹 오브 팝>이 돼버렸다. 의미심장하다.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팝송모음  (0) 2009.07.19
The Gypsy - Jose Feliciano  (0) 2009.07.18
양희은 - 상록수  (0) 2009.05.27
저 산너머  (0) 2009.03.22
산노래 가사 모음집  (0) 2009.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