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의 발자취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

노공이산 2014. 5. 28. 09:52

 

 

 퇴계 이황의 생애

 

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 자는 경호, 호는 퇴계 혹은 도유, 퇴도, 청량산인 등이며, 관향은 진보이다.

퇴계는 연산군 7년(1501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 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권'태극도설'과 마지막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중년기 :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 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부인 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군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과 천명도설후서(1553), 고봉 기대승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1559~1566), 주자서절요(1556), 자성록(1558), 전습록논변(1566), 무진육조소(1568), 성학십도(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사망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등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 도산서원

 

 

  ▲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안동호의 시원한 물줄기가 발 아래로 펼쳐진다.

 

 

 ▲ 시사단(試士壇). 조선 정조 16년에 퇴계선생을 흠모하던 정조임금이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과거시험인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치른 장소이다.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고 임금이 직접 11명을 선발하였다고 한다.

 

 

 ▲ 도산서당(陶山書堂). 퇴계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거처하시던 방은 '완락재(玩樂齋)' 라 하였고

글을 가르치던 마루는 '암서헌'이라 하였다.

 

 

 ▲ "저 매화나무에 물 줘라!" 퇴계선생이 마지막 하신 말씀이다. 매화는 떨어진지 오래이고 탐스런 매실이 달려 있었다.

 

 

 ▲ 광명실(光明室).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현판은 퇴계선생 친필이다. 동, 서 두 곳 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濕害)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었다.

 

 ▲ 전교당(典敎堂). 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조선 선조7년에 건립된 대강당이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 선조는 도산서원에 현판을 사액(賜額)하였으며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 역락서재(亦樂書齋). 퇴계의 친필 글씨이다.

 

 ▲ 서원 앞에 두 그루 커다란 왕버들 나무가 있어 한껏 정취를 더해준다.

 

 ▲ 올해 유난히 가문 탓에 안동호 물줄기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 보인다. 잉어일까  커다란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쳐간다.

 

 

그대 가니 이 봄을 누구와 더불어 노닐꼬

새 울고 꽃 떨어져 물만 홀로 흐르네.

이 아침 물가에서 그대를 보내노니

그리워 만나려면 물가로 다시 오리.

 

 

 

 퇴계묘소

 

  ▲ 퇴계묘소 가는 길. 퇴계종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퇴계선생의 묘소가 있다.

 

 ▲ 퇴계묘소. 퇴계선생의 유언에 따라 봉분도 자그마하고 규모도 조촐하기만 하다.

 

 ▲ 작은 비석 하나에 퇴계선생이 스스로 찬한 명문(退溪自銘)이 새겨져 있다.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 많아

중간에 어찌하다 학문을 즐겼는데

만년에는 어찌하다 벼슬을 받았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더 주어졌네

나가서는 넘어지고

물러서서는 곧게 감추니

나라 은혜 부끄럽고

성현 말씀 두렵구나

산은 높고 또 높으며

물은 깊고 또 깊어라

...

조화 타고 돌아가니

무얼 다시 구하랴

 

 

 

 ▲ 퇴계의 묘소아래에 있는  며느리 봉화금씨의 묘

 

퇴계의 묘소 바로 아래에는 며느리인 봉화 금씨의 묘가 있는데 아들도 손자도 아닌 며느리묘가 이곳에

조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퇴계의 묘소 아래 며느리묘가 조성된 이유

퇴계의 맏아들이 장가를 가게되어 당시 안동,봉화지역의 권세가였던 봉화금씨 집안과 혼인을 하게되었는데

봉화금씨 집안에서는 비록 본인은 당대에 유명한 학자였으나 집안이 한미하던 퇴계선생을 엄청 무시했다고 한다.

아들이 장가가던 날 사돈집을 방문했는데 집안의 어른들은 그를 무시해서 아무도 나와서 맞아주지 않았고

이황과의 혼인을 고집했던 사돈만이 나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대접도 소홀하기 그지 없었지만 이황은 내색하지 않고 예의를 다해

사돈을 대한 뒤 집으로 돌아 갔다.

이황이 돌아간 뒤에도 금씨 집안의 소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 가문 정도면 어떤 권세가와도 이어질 수 있거늘 왜 저런 별볼일 없는 인간과 연을 맺으려는 것이냐"

"저런 인간이 우리집 마루에 엉덩이를 붙인것만으로도 집안의 수치다!"

아예 자리가 더러워졌다면서 이황이 앉았던 마루를 대패로 밀어버렸다고 한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황의 문중에선 난리가 났다.

"자기네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우리 집안을 이렇게 무시하는가"

"가서 확 뒤집어 버립시다!"

 

하지만 퇴계는 가족들을 불러 조용히 타일렀다.

"사돈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들 우리로서는 관여할 바가아니다. 가문의 명예란 문중에서 떠든다고 높아지는 것도 아니요.

남들이 헐뜯는다고 낮아지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이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나도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 가문은 사돈댁 가문보다도 형편없는 가문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 아니겠느냐. 더구나 우리는 사돈댁의 귀한 따님을

우리집 며느리로 맞아오는 터인데 우리가 그런 하찮은 일로 말썽을 일으키면 새 며느리가 얼굴을 들 수 없게 될것이

아니겠느냐. 내 며느리를 봐서도 아무 소리 말고 물러들 가거라"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며느리를 맞아들였으며 새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며느리는 시아버님의 넓은 도량에 한평생 높이 받들어 모셨으며, 훗날 세상을 떠날 때

 "시아버님 생전에 내가 여러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죽어서도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나를 시아버님 묘소 아래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 는 유언을 남겨

금씨는  퇴계선생의 묘 아래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봉화 금씨의 며느리들

봉화 금씨는  슬하에 안도(安道), 순도(純道), 영도(詠道)등 세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맏며느리 안동권씨는

남편이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임진왜란을 당하자 온몸을 던져 퇴계선생이 남기신 서책과 유물들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가문을 굳건하게 지켜 훗날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둘째며느리는 명문가로 널리 알려진 선산김씨(善山金氏)의 후손으로

지금의 진성이씨 선인파가 바로 이 선산김씨 후손들이다. 셋째며느리 안동권씨는 수졸당 기(守拙堂 岐)와 맏집으로 출계(出系)한

억의 어머니로서 의인파(宜仁派)를 제외한 상계파(上溪派)와 하계파(下溪派) 진성이씨(眞城李氏)는 모두 이 분의 후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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