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한(盧閈)
노한(盧閈) 우왕 2년(1376)∼세종 25년(1443)졸. 자는 유린(有隣), 호는 효사당(孝思堂),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며
본관은 교하(交河), 증조는 첨의정승 노책(盧頙), 아버지는 대리경 노균(盧鈞), 배위는 좌의정 민제(閔霽)의 따님 여흥민씨로 태종 이방원과는 동서간이며,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은 그의 손자이다.
16세에 음보로 지사간원사가 되고, 태종 3년(1403) 좌부승지, 이듬해 이조전서·경기도관찰사, 1405년 동지총제, 이듬해 풍해도관찰사 등을 거쳐 1408년에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이듬해 처남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가 신극례(辛克禮)와 함께 종친을 이간하고 불충의 언동이 있었다고 하여 이화(李和) 등의 탄핵을 입어 유배, 사사되자, 이에 연좌되어 1409년에 파직 당하였다.
이에 양주별장에서 14년간을 은거하였는데 세종 4년(1422) 상왕 태종이 “노한이 민씨에게 장가를 들었다고 고신까지 거두게 된 것은 그의 죄가 아니니 급히 불러들이라.”는 전교에 의하여 다시 한성부윤에 복관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참찬의정부사·판한성부사를 거쳐, 1432년에 찬성사, 1434년에 찬성사 겸 대사헌, 이듬해 우의정 등을 지내고, 1437년에 사직하였다.
노한은 천성이 너그럽고 화평하였다. 어머님(개성왕씨대부인)이 편찮으시자 벼슬을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세종대왕은 키가 구척이신 이모부 노대감에게 명나라 사신들의 행패를 위엄으로 누를 분은 노대감 뿐이라며 윤허치 않아 낮에는 관청업무를, 밤에는 모친 간병을 하여 완쾌하였고, 5년 후 모친이 89세로 별세하자 만사리에 장례 후 삼년간 시묘하고 북쪽에 효사정(孝思亭)을 짓고 개성의 아버지 묘소와 대방동의 어머니 묘소를 향하여 효사효사(孝思孝思)하셨다.
공께서 서거하자 세종대왕은 정사를 3일간 휴무하여 예장을 명하고 장례비를 국비로 내렸다.
노한 묘(파주읍 백석리)
노한의 신도비(파주읍 백석리)
효사정 (孝思亭)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흑석동 한강변에 있는 선영에 모시고 지극한 효성으로 무덤 옆에 초막을 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도 서러워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는 효심이 가득했던 분이다.
지금의 효사정은 넓이 약 46.98㎡의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 집 구조와 검소한 인도리가구 구조의 팔작 기와 지붕에 온돌방 1칸을 겸한 정자형식으로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이곳은 우수경관 조망소인데, '하이 서울축제'기간에는'한강정자문화제'가열리는 장소로 효사정 글짓기 대회가 열리고 있다.
효사정 현판
효도 전화 의자도 있고..
효사정에서 바라본 강 건너 이촌지구
찾아 가는 길
9호선 흑석역 1번출구로 나가면 오른편으로 바로 보이는 원불교 서울교당, 그옆에는 동작구 흑석체육센터가
있는데 체육센터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안내 간판이 있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선현의 발자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재 권벌과 닭실마을 (0) | 2014.06.26 |
---|---|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 (0) | 2014.05.28 |
황희정승과 반구정 (0) | 2014.03.26 |
이율곡과 자운서원 (0) | 2014.03.22 |
노사신과 효사재 (0) | 2014.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