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내 안의 아버지/박노해

노공이산 2014. 12. 31. 11:43

 

 

내 안의 아버지

 

    - 박노해 -

 

 

마라톤을 그리 잘하셨다는데

40언덕에서 쓰러져 그대로 저승길 달리셨나요

이 산하를 바람처럼 떠돌았는데

남도 산자락에 누운 채로 흰 구름이신가요

판소리 가락이 절창이셨다는데

깨어진 노래 품고 이리 단호한 침묵이신가요

못다 핀 꽃, 못다 한 정, 못다 한 노래 다 비우고

어둠 속 흰 뼈로 빛나며 이 새벽 저를 부르시나요

 

 

 

얼굴 조차 기억나지 않는 내 아버지, 당신의 제삿날

법무부에서 지급한 볼펜으로 아버지 이름을 써서 벽에 붙입니다

사진 한 장 가진 게 없어 이름이라도 써놓고 바라보려니,

이름이 말씀을 하십니다

박정묵(朴正默)

바르게 침묵하라

정직해라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바로잡아야 한다

 

 

예, 아버지

 

 

독방 벽 속에 침묵 절필해온 당신의 아들이

찬물 한 그릇 떠놓고 당신 말씀을 듣습니다

 

 

목이 마르구나 목이 마르구나

 

 

예, 아버지

 

 

물 한 그릇 들어 절하고 제 안에서 목마른 당신께 드리는 물 한 그릇

제가 마십니다

 

 

꿈 속에서 감옥문 나서자 홀로 숨어들듯 20년 만에

아버지 무덤을 찾았습니다

 

 

아버지, 무덤이 몹시 낮아졌네요

죄송해요 세월이 그리 험하게 흘렀어요

무덤이 이리 평평해지도록 돌비석 하나 세우지 못하고

손주 하나 안겨드리지 못하고 삭발 머리에 빈 몸으로

저 이렇게 그냥 혼자 왔어요

 

 

아니다

애 많이 썼다

 

 

땅속에서 기침하며 돌아누우시는 아버지

 

 

내 무덤 높이지 말고 돌 세우지 마라

흙 속에 곱게 썩어야 흙으로 돌아가지

무덤이 점점 낮아져야 평평한 땅으로 돌아가지

 

 

예, 아버지

 

아가, 갖지 말고 홀가분히 잘 돌아가야지

힘들어도 낮은 자리로 어서 돌아가야지

다 놓아주어야 처음 자리도 돌아가는 거지

그래야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지

 

 

예, 아버지

 

 

흙으로 돌아가신 만큼 제 안에 들어와 꽃이시네요

낮아진 무덤자리만큼 제 앞이 환해지네요

아버지, 저 다시 또 못 찾아뵐지도 몰라요

이제 오늘의 현장으로 저 먼 길 떠나려 해요

용서하셔요 아버지

 

 

아니다

몸조심하거라

 

 

내 안에서 기침하며 돌아누우시는 아버지

흰 뼈로 돌아누우시는 아버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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